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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리뷰] 아이 캔 스피크

빗도 2017. 10. 8. 23:38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 둘과 만난 김에 함께 영화를 봤다. 이미 혼자서라도 관람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일부러 함께 보려고 아끼고 참아왔던 영화였다. 친구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지만, 원래 이런 장르의 영화를 싫어하는 친구들이니 그러려니. 사실 나 때문에 억지로라도 영화 관람에 어울려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관람하고 왔다. 내가 기대하고 고대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영화는 민원 왕 도깨비 할매 '옥분'과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20여 년 간 아무도 막지 못했던 무적의 옥분 할머니는 원칙주의자인 민재의 등장에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보란 듯이 원칙대로 서류를 작성하여 수십 건의 민원을 접수해낸다. 그 정도로 열성적이고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옥분 할머니조차 영어만큼은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다. 영어 학원에서 원어민과 능숙하게 대화를 해내는 민재의 모습을 본 옥분 할머니는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며 부탁하지만, 민재는 옥분 할머니가 접수한 수십 건의 민원 덕분에 시간이 나질 않는다며 거절한다.



민재는 학업 때문에 집안 사정에 어두웠다. 뒤늦게 집안 사정을 알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다. 유일한 가족인 남동생과 서먹하게 지내고 있지만 불우했던 가정사로 혹여나 남동생이 탈선하진 않을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늘 걱정뿐인 민재. 우연히 옥분 할머니가 자신의 남동생에게 저녁밥을 챙겨주며 손주처럼 예뻐해 주고 보살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로 옥분 할머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민재는 정식으로 영어를 가르쳐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옥분 할머니와 민재, 민재의 남동생은 서로 부족했던 가족이라는 빈 부분을 점차 채우며 가까워진다.



옥분 할머니는 도대체 왜 영어를 그리 배우고 싶어 하는 걸까? 영화 중반부, 옥분 할머니는 미국 LA에 어렸을 적 입양 보내진 자신의 남동생이 있다며, 어떻게 사는지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 영어를 배우려 한다고 말한다. 민재처럼 유일한 가족이 남동생뿐인 옥분 할머니에게 남동생과 직접 '말로써' 안부를 묻는 것은 물론 충분히 중요하고 의미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통역사를 쓴다던지, 혹은 번역기를 이용해 편지를 보낸다던지, 본인이 직접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않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렇다. 옥분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다.



영화 후반부, 나름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는 할머니의 과거와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가 밝혀지는데, 가족도 없이 과거를 꽁꽁 숨기고 살아온 옥분 할머니는 사실 위안부 피해자였고,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의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에서 증인으로써 발언 예정이었던 옥분 할머니의 친구이자 은인이었던 '정심'을 대신해 발언하려 했던 것.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민재는 옥분 할머니에 대한 오해와 마찰을 만회하기 위해 전폭적으로 옥분 할머니를 돕게 되고, 덕분에 옥분 할머니는 무사히 발언을 마친다.


예고편을 통해 영화의 결말까지 어느 정도 알려진 부분이 많았지만, 이미 아는 내용임에도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은 도저히 대비를 할 수가 없었다. 영화 후반부부터 엔딩까지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웃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오해도 많이 사면서까지 오지랖을 떨고 그들을 대변했던 옥분 할머니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했던 탓일까, 정말 올해 초 <너의 이름은。> 이후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영화는 처음이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택시운전사>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영화 내용 전체가 실화라는 게 아니고,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고 이는 영화 마지막 엔딩 이후에 관련 자료와 함께 언급된다. 다만 일본은 이에 대해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의 말 한 번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이렇게 계속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덮으려고만 하면 언젠간 속에서 곪아 터질게 분명한데. 세계 1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종전 이후 전범들을 색출하여 처단하고, 세계적으로 사과하고 수습하려 한 모습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희로애락이 굉장히 진했다. 초중반까지는 관객들 모두 웃을 수 있는 재밌는 대사나 연출이 몇 군데 있어서 즐거웠고, 후반부터는 눈물샘을 터트릴 만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감정 소모가 심해서 후반부에는 울다가 지칠 정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좋았다. 혹자는 소재를 이용한 전형적인 억지눈물 감성팔이 영화로 평가하고 실제로 그런 느낌을 떨쳐낼 수는 없지만, 소재를 이용한 감성팔이로는 영화 <군함도>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만족스럽게 봤다. 근데 나는 웬만한 영화를 다 재밌게 봐서(가장 최근에 본 <킹스맨 2>도 남들은 다 별로라는데 난 꿀잼이었음)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겠지만, 눈물 쪽 빼고 싶다면 한번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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